어린 자녀와 함께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다 보면,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과연 이 순간을 기억이나 할까?" 모든 순간은 아니지만, 적어도 행복한 순간만은 기억하길 바라는 건 모든 부모의 마음일 터. 아이는 몇 살부터 자신이 경험한 일을 기억할 수 있을까?
우리 아이는 과연 이 순간을 기억할까?
아무리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자기 삶에서 서너 살 이전의 일들은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이처럼 사람의 초기 몇 년 동안의 기억에 공백이 발생하는 증상을 '유아 기억상실증(infantile amnesia)'이라 한다. 보통 만 3세까지의 기억은 온전하지 않다고 알려져 있으며, 만 4세의 기억 역시 단편적이며 불완전한 경우가 많다.기억은 원래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기 마련이지만, 유아 기억상실증의 경우 시간에 의한 기억력 감퇴와는 차이가 있다. 언어발달이 이루어지기 전인 만 3세 이전의 기억은 비언어적 형상이나 표상, 감정, 느낌 등의 감각적이고 비언어적인 기록 방식으로 저장된다. 따라서 언어적 사고에 익숙한 어른은 어린 시절의 비언어적 기억을 회상하기 어려울 수 있다.
어른과 아이, 기억하는 방식 달라
인지심리학자들은 정보처리이론에서 기억의 구조를 감각기억(sensory memory), 단기기억(short-term memory), 단기기억이 확장된 개념인 작업기억(working memory), 장기기억(long-term memory)으로 분류한다. 감각기억은 시각·청각·촉각·후각 등을 통해 입력된 정보를 1~4초 정도 매우 짧은 시간 동안 기억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 중 일부가 선택적으로 단기기억이나 작업기억으로 저장되며, 영구적으로 저장되는 기억이 장기기억이다.이 중 작업기억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는 고차원적 인지기능이다. 매 순간 서로 다른 정보를 처리하면서 장기기억 정보를 불러오기도 하고, 필요 없는 정보를 삭제하는 등 인지 기능에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기억 처리 시스템이다.
러시아 고등경제대학(HSE)의 과학자들은 어린이들의 작업기억에 대해 독자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그 결과, 어른의 뇌는 두정골에서 시·공간적인 정보를 처리하고 있으며, 회상, 학습, 추론 등 작업기억과 같은 복잡한 문제는 전전두엽이 처리했다. 그러나 아이의 뇌는 전두·두정골이 아니라 대뇌섬(insula)에서 작업기억 정보를 처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를 이끈 마리 아르살리두(Marie Arsalidou) 교수는 "뇌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작업기억을 담당하는 부위가 변한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며 "연령별 연구 범위를 축소해 더 세부적인 연구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새로 형성된 뉴런이 저장된 기억 없애
아이의 뇌가 경험을 어떻게 기억(저장)하는지를 간접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 되는 연구는 또 있다. 일찍이 1980년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North Carolina State University)의 심리학 연구팀이 신생아의 행동 반응을 살펴 아기의 기억을 이해하려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아기는 신생아 때부터 젖꼭지를 빠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연구진은 아기가 젖꼭지를 빠르게 빨 때는 엄마의 목소리를, 느리게 빨 때는 다른 낯선 여성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그랬더니 생후 3일 이내의 신생아도 엄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젖꼭지를 빠는 속도를 조절하는 모습이 관찰됐다. 신생아도 엄마의 목소리와 낯선 목소리를 구분한다는 이 연구 결과는 아기가 배 속에서 듣던 익숙한 소리를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아기 때도 경험을 저장할 수 있다. 하지만 세 살 이전에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영역인 해마(Hippocampus)와 관련이 있다. 캐나다 토론토대(University of Toronto)의 시나 조슬린(Sheena Josselyn) 교수와 폴 프랭클랜드(Paul Frankland) 교수는 해마에서 신경세포 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더 기억을 잊게 되는 현상을 발견했다. 연구진이 2014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기억 형성에 관여하는 뇌의 해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뉴런이 저장된 기억을 없애는 것으로 밝혀졌다.연구를 진행한 조셀린 박사는 "새로 만들어진 뉴런이 오래된 기억을 지움으로써 새로운 기억을 위한 길을 내주는 유용한 역할을 수행한다"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새끼 쥐한테 해마 신경세포의 생성을 억제했더니 오히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더 잘 유지됐다. 반대로 어른 쥐한테 해마 신경세포의 생성을 늘리자 기억을 쉽게 잃었다. 즉, 해마 신경세포 생성을 조절할 수 있다면 유아의 기억도 온전할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잃어버린 유년기 기억을 되살리는 방법은 아직 없다. 하지만 아이들이 유년기의 기억을 더 많이 남길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다. 즐거웠던 일을 자주 반복해서 함께 이야기하고, 직접적인 정보를 주는 것보다는 언어를 사용해 기억을 체계적으로 전달한다면, 더 오래 기억을 유지할 수 있다.
출처: 건강이 궁금할 땐, 하이닥 (www.hido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