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명 배우 브래드 피트는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장애인 안면실인증(prosopagnosia)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는 "공식적으로 진단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 증상 때문에 주변의 신뢰를 잃고 있으며, 집에 틀어박혀 지내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극히 일부만 겪을 것 같은 안면실인증이지만, 국제 학술지 피질(Cortex)에 게재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의외로 많은 사람이 사람의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
매일 본 얼굴도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
안면실인증은 시력·지능·주의력결핍·말하기 등 장애가 없는데도, 사람의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장애 또는 증상이다. 얼굴 대신 머리 스타일, 걸음걸이, 옷, 핸드백, 목도리 등으로 특정인을 구별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브래드 피트뿐 아니라 우리나라 방송인 박소현, 배우 오정세, 배우 서현철 등이 안면실인증으로 사회적·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안면실인증은 안면인식장애라고도 부르는데, 전 세계 인구의 약 2%가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최근 미국 하버드대(Harvard University) 의대와 VA 보스턴 헬스케어 시스템(VA Boston Healthcare System)이 공동으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선천적 안면인식장애 유병률이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3%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선천적인 안면인식장애 유병률은 지금까지 2~2.5% 정도로 여겨졌다.
안면인식장애 환자, 33명 중 1명꼴 예상보다 많아
VA 보스턴 헬스케어 시스템의 조셉 데구티스(Joseph DeGutis) 박사 연구팀은 18세에서 55세 사이의 3,116명을 대상으로 온라인상에서 설문과 테스트를 진행했다. 우선 실험 참가자에게 일상생활에서 얼굴을 인식하는 것이 어려운지 물었다. 이후 두 가지 테스트를 진행해 유명인의 얼굴이나 전혀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인식 가능한 지 판단했다. 조사 결과 3,116명 중 31명이 심각한 선천적 안면인식장애 증상을, 72명이 가벼운 안면인식장애 기준을 충족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에 따르면 사고 등으로 생긴 뇌 손상으로 인한 후천적 안면인식장애는 미국 내에서 약 3만 명 중 1명꼴로 매우 드물게 발병한다. 그러나 유전 및 발달 이상에 따른 선천적인 안면인식장애는 33명 중 1명(3.08%)으로 비교적 많은 사람에서 증상이 나타났다.
연구팀은 안면인식장애가 개인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초래할 뿐 아니라 고용 기회가 제한될 수 있고, 안면 식별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자폐 스펙트럼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연구를 이끈 데구티스 박사는 "사회적 고립이 증가하는 현대사회에서 사회적 유대감 유지와 원활한 의사소통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라며 안면인식장애 이해와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실제로 얼굴 인식에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기존의 엄격한 판단 기준으로 인해 안면인식장애가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있다. 이에 진단 기준을 확대함으로써 적절한 치료를 해야 하며, 주변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증상과 장애를 알려 일상생활에 미치는 악영향을 줄이기 위한 노력해야 한다. 안면인식장애는 뇌졸중, 뇌종양, 치매 등 퇴행성 질환 등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 밖에도 머리 부위(두부) 손상, 유전적 이상 및 발달 이상으로 발생할 수 있다. 노인 인구의 급증으로 안면인식장애도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데구티스 박사는 "정확한 안면인식장애 진단을 위해 일상생활의 어려움에 대한 환자의 자가 신고와 검증된 객관적 지표를 조합해 진단하는 것이 중요” 하며 "지각 능력을 높이는 인지 훈련 등 조기 치료를 서둘러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얼굴 말고 다른 식별 수단 활용하면 도움 돼
안면실인증을 겪는 사람들은 같은 사람을 최소 세 번 이상 본 뒤 얼굴을 기억해 낸다. 매일 보는 친숙한 얼굴(함께 사는 배우자, 자녀 등)을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안면실인증을 의심해야 한다. 생활에 불편을 느낄 만큼 증상이 심하면 CT·MRI 검사를 통해 뇌에 다른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안면실인증의 원인은 다양하다. 뇌졸중이나 외상으로 인해 사물 인식을 담당하는 뇌 부분이 손상돼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며, 유전적 요인, 치매 등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별한 문제가 없어도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의 차이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다.
안면실인증 환자는 친숙한 사람들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할 뿐 다른 기억들은 정상이다. 기본적인 감각이나 지능, 주의력 등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장소나 사물에 대한 인식 장애가 동반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얼굴’만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안면실인증을 앓고 있다면, 환자 스스로 기억하는 방식을 터득하는 게 최선이다. 수염, 안경, 머리카락 등 얼굴이 아닌 다른 식별 수단을 활용해 사람을 인식하고 구별하는 식이다. 또 상대와 대화량을 늘려 목소리, 몸짓 등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도 방법이다.